헬스

선수촌 선수들의 하루일과 24시

천국의 시초 2022. 6. 16. 04:17
한 달 앞으로 다가온 런던 올림픽. 태릉선수촌에는 단내 나는 신음과 파이팅이 넘쳤다. 박종길 촌장은 “젊은이들이 꿈을 위해 피땀 흘리는 이곳만큼 멋진 곳이 어디 있냐”고 했다. “턱걸이 한 개도 못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런 체력으로 무슨 럭셔리한 삶을 살겠나”라고도 했다. 올림픽 준비 실황과 관전 포인트는 물론 멋진 삶을 위한 촌장의 조언.


여기는 체력단련실. 권투 49kg급의 강력한 금메달 후보인 신종훈 선수는 1m 높이의 운동 기구에 양발을 고정하고 허리를 숙였다 올리기를 반복했다. 30개씩 10회니까 총 300회.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가까스로 몸을 들어 올리면 앞에 선 감독이 농구공을 몸통 쪽으로 힘껏 던졌다. 힘겹게 공을 돌려주고 다시 몸을들어 올릴 때 선수는 ‘으악’ 하며 온몸의 에너지를 쥐어짰다. 오후에는 공기를 빼 물컹한 농구공을 바닥에 내리쳐 튀어 오르게 하는 동작을 수백 번 반복했다. 박종길 촌장은 “그래, 그래, 파이팅! 즐겁게 하자. 그래야 금메달이 오는 거야”라며 손뼉을 쳤다. 레슬링과 유도 국가대표 선수들은 타이머를 손에 쥔 감독의 불호령에 맞춰 헉헉거리며 계속해서 운동장을 뛰었고, 하키 선수들은 땀이 흥건한 채 세트 플레이를 연습했다. 레슬링 55kg급의 이우주 선수와 66kg의 김대성 선수는 다른 선수들이 체력단련실을 나간 이후까지 남아 밧줄을 탔다. “내일 올림픽출전권을 주는 3차 쿼터 대회가 중국에서 있다. 잘하고 오겠다.” 그들의 파이팅에는 한숨과 눈물, 땀과 걱정이 뒤엉켜 있는 듯했다. 박종길 촌장은 1970~1980년대 사격 간판 스타다. 1978년 방콕 아시안 게임부터 3회 연속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올림픽에서도 금메달 후보 0순위였지만 운이 따르지 않았다.1984년 LA올림픽. 속사 권총 부문에 출전한 그는 첫날 300점 만점에 298점을 쐈다.

세계 신기록. 이틀 기록을 합산해 순위를 가렸는데 둘째 날 294점을 쏘는 바람에 5위로 밀렸다. “첫날 긴장을 한 탓에 어깨가 굳고 쑤셔 잠이 안 오더라고요. 지금은 물리치료사가 동행을 하지만 그때는 어디 그랬나. 혼자 뒤척이다가 경기장에 나갔지. 그렇게 금메달을 날리니까 좌절감이 심했어요. 6개월간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났다니까. 이번 올림픽에서 그 한을 풀고 싶어요. 후배들한테 노하우도 전수해주고 기도 불어 넣어가면서.”
태릉선수촌은 국가대표와 국가대표 상비군이 집결, 세계 대회를 준비하는 합숙훈련장이다. 1966년 건립했으며 약 20종목, 45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다. 시설이 노후돼 충북 진천에 제2의 선수촌을 세우고 있지만 수많은 선수들의 땀과 열정이 녹아 있는 태릉선수촌의 존재감과 위상은 여전하다. 박종길 촌장은 지난해 1월 부임한 이래 선수들과 동고동락하며 결전을 준비하고 있다. 평일에는 선수촌에서 생활하고 주말에만 집에 가는데 선수 선발전 같은 중요 행사가 있으면 그마저 포기한다. 런던으로 떠나기까지 그의 일과는 바뀌지 않을 것 같다.

AM 6:00 금메달 10개는 기본, 13개가 목표다
매일 아침 6시 태릉선수촌에 입소한 모든 선수들은 운동장에 함께 모여 몸을 푼다. 이후에는 팀별로 아침 운동을 시작한다. 불암산 3km 구간을 크로스컨트리로 돌고 계단 뛰어오르기를 반복했다. 박 촌장도 체육복 차림으로 몸을 같이 풀었다. 그는 매일 선수들과 아침 체조를 함께한다. 가까이에서 함께 뛰고 훈련을 해야 선수들 마음이 어떤지, 필요한 지원이 무엇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다부진 몸집의 선수들은 박 촌장을 보고 “안녕하십니까” 하고 큰 소리로 인사했다. 군대 같았다. 박 촌장의 노력으로 올해 국가대표 선수들의 훈련 수당은 하루 3만 원에서 4만원으로 늘었다. 소속이 있는 선수들은 별도의 수당과 월급을 받는다. 부모님께 갈 때 과일이나 고기라도 사가자는 박 촌장의 배려다.

2012 런던 올림픽 출전 선수 명단은 속속 결정되고 있었다. 농구, 배구같은 구기 종목과 수영은 6월 말 최종 명단이 나온다. 한국 선수단은 총 26개 종목 중 23개 종목에 출전한다. 세계 랭킹 200위 안에 들어야 하는 테니스와 누적 포인트가 중요한 카누, 승마는 출전권을 얻지 못했다. 박촌장은 금메달 10개는 무조건이고 13개가 목표라고 했다. “양궁, 태권도, 유도, 배드민턴, 역도, 체조, 수영, 사격, 펜싱, 레슬링, 복싱 이상 11개는 확실하고 사이클, 탁구, 요트, 핸드볼, 하키도 깜짝 금메달이 가능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자신하느냐는 질문에는 “하루 24시간, 2년 가까이 선수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보고, 선수선발전 등을 따라다니다 보니 금메달이 보여요. 경기력과 파이팅, 투지 등을 보면 감이 오지요. 믿어도 좋습니다”라고 했다. 올림픽 두 번째 금메달에 도전하는 선수는 레슬링 정지현, 사격 진종오, 수영 박태환, 배드민턴 이용대, 역도 장미란과 사재혁, 태권도 황경선과 차동민 등 총 8명. 이밖에 ‘깜짝 사고’를 칠 선수가 약 50명이 있다고 했다.

우리나라 올림픽 선수촌의 시설과 열기는 선진국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 “독일, 프랑스, 일본, 미국, 호주 등지를 다녀봐도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어요. 미국의 경우 올림픽이 농구나 미식축구만큼 인기가 높지 않기 때문에 이런 열기를 찾아보기 힘들어요.” 그러면서 박 촌장은 “촌장도 경쟁입니다. 다른 나라 올림픽 선수촌에도 나 같은 촌장이 있을 거 아닙니까. 지면 안 되지. 세계 최고의 선수촌장이 되는 것, 그게 내 목표입니다”라고 했다. 선수들이 팀별로 훈련하는 것을 확인한 박 촌장은 체력단련장으로 이동, 개인 운동을 마저 했다. 올해 66세의 그는 물구나무 선 채 팔굽혀펴기를 10여 차례 이상 할 만큼 체력이 탄탄했다.

AM 7:30 “상쾌하고 활기차게 아침을 맞는 것이 럭셔리”
박 촌장은 식당에 들어서면서부터 선수들을 챙겼다. 밥이 힘이다, 많이먹어라, 왜 이렇게 남겼느냐, 요즘 컨디션은 어떠냐…. 식당 직원들에게도 일일이 이름을 부르며 인사를 했다. 교장, 코치, 감독, 친구, 관리자 등 촌장이란 이름에는 수많은 역할이 포함돼 있는 것처럼 보였다. “촌장의 첫 번째 덕목은 열정이에요. 열정만 있으면 다른 게 좀 부족해도 다 커버가 돼요. 열심히 하는 것이 보이니까 모두 따라온다고. 그다음은 신뢰예요.

은연중에 ‘아, 이 사람만 믿고 따라가면 되겠구나’, ‘나중에 다른 말할 사람은 아니구나’ 하는 믿음을 줘야 해요 그러려면 솔선수범해야지. 흠을 보이면 안 된다고. 직능이나 직군별로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야 합니다. 식당 직원들에게까지 엄격하고 절도 있는 모습을 고집해선 안 돼요. 우리 식당에 총 23명이 있는데 이름을 거의 다 외워요. 밥하는 사람, 국 끓이는 사람, 그릇 씻는 사람, 반찬 하는 사람 다 다른데 ‘조남조 씨(박 촌장은 ‘국 끓이는 직원이에요. A조에’ 라고 설명했다), 오늘 국이 참 맛있네. 어떻게 끓인 거야?’ 하고 친근하게 말도 걸 줄 알아야해요. 이런 사소한 배려가 선수들 경기력과도 다 연결이 돼요.”

촌장은 밥맛이 좋아 보였다. “아침에 운동을 열심히 했잖아요. 상쾌하고 활기차게 아침을 맞이하는 것이 럭셔리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돈이 많고 명예가 높으면 뭐합니까. 몸이 건강하지 않으면 인생을 누릴 수 없는데. 어떤 조사를 보니 초등학생 100명 중 턱걸이를 한 개 이상 할 수 있는 아이가 채 10명이 안 되더라고요. 어른이라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 같지 않습니다. 아무리 체력이 부실해도 두 손으로 자기 몸을 들어 올릴 정도는 돼야 해요. 학교 폭력 문제가 심각한데 체육부터 활성화시켜야 됩니다. 열심히 뛰어놀아야 심신이 건강해지는 건데 교실에 박혀서 공부만 하고 있으니 마음이 비뚤어지지 않겠습니까? 어른들도 더 늦기 전에 운동을 시작해야 합니다. 지금은 괜찮을지 모르지만 노년이 괴로워져요.”

AM 09:00 헝그리 정신으로 운동하지 않는다
선수촌장실에는 2012년 런던 올림픽 출전권 획득 일람표가 붙어 있는데, 각 종목별로 주요 대회와 기간, 획득 목표와 획득 현황이 표시돼 있다. 박 촌장은 이곳에서 행정 업무를 보며 추가 지원이 필요한 부분은 없는지 챙기고, 각 팀의 전지훈련 일정도 논의한다. 최근에는 탁구훈련장을 새롭게 정비했다. 올림픽 무대와 거의 동일한 수준. 깨끗한 최신식 연습실이 생기면서 선수들의 사기도 그 어느 때보다 높다. “우리 때에 비하면 정말 모든 게 좋아졌어요. 우리는 헝그리 정신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살았는데 지금은 과학과 첨단 기술을 이용한 훈련이 자리를 잡았어요.

선수촌 가까이 체육과학연구원이 있어 각 종목마다 각종 데이터와 동작 분석을 통한 솔루션을 제공해요. 병원도 있어 물리치료 등을 받기도 쉽고요. 이런 모습을 보면 ‘아, 이제 우리도 되겠구나’ 하는 확신이 더 강하게 들죠. 우리 세대가 나라에 금메달을 안기겠다는 사명감에서 운동을 했다면 요즘 선수들은 자신의 꿈과 행복을 위해 운동을 합니다.” 박 촌장은 해병대 출신. 현역 군인으로 장교 생활을 하다가 해병대 사격 대회에서 1등을 하면서 국가대표로 발탁됐다. 1978년 방콕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딸 때만 해도 나라 분위기는 지금과 사뭇 달랐다. 금메달을 목에 걸고 소감을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 박 촌장은 “김일성의 눈을 쏜다는 심정으로 임했다”고 했다. “그때는 정말 살벌했습니다.

북한 괴뢰군이라고 해야지 북한이라고 말하면 바로 정보부로 끌려가던 때였으니까. 북한은 적이고, 괴물이고, 죽여야 할 상대였지, 동지 개념이 전혀 없었어요. 중국은 중공이라고 불렀고.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사격 국가대표였던 북한 이호준 선수가 세계 신기록으로 금메달을 땄는데 ‘적의 심장을 겨누는 심정으로 총을 쐈다’고 했어요. 그 말을 듣고 나도 그렇게 말한 거지”(웃음) 인터뷰 중에도 박 촌장의 전화는 계속해서 울렸다. 예상 금메달 숫자를 물어보는 이가 많았다.

AM 11:00 우리 모두는 행복한 감옥 생활 중
선수촌장실에서 업무를 마친 그는 다시 운동장으로 갔다. 일찍 찾아온 더위에 선수들은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 선수들을 향해 박 촌장은 “힘내자! 파이팅!” 하고 구호를 외쳤다. 코치와 감독을 만나서는 지원 필요 분야, 애로 사항, 선수 개개인의 상태를 체크했다. 1년 넘게 이어지는 이런 긴장의 일상이 지겹진 않을까? “사이클의 조호성 선수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더라고. ‘지금 행복한 감옥 생활을 하고 있다.’ 저도 그래요. 영광의 그날을 위해서 하루하루 열심히 훈련하는 선수들을 보고 있으면 행복합니다. 봄에 상추랑 고추랑 방울토마토키워봐요. 하룻밤 자고 나면 쑥쑥 자라지. 그걸 보고 있으면 흐뭇하고 기분이 좋아요. 좋은 성적을 거둬 국민에게 기쁨을 주자는 목표가 있으니 이 생활도 좋은 거라. 목표가 있고 꿈이 있으면 다 재미있는 겁니다.

힘든 거, 죽을 거 같은 거 다 극복이 됩니다. 반대로 꿈이 없으면 못 견뎌요. 예전에 우리가 도전할 때랑 비교하면 여러 모로 조건이 좋아요. 정부에서 얼마나 많이 지원을 해 줍니까. 꿈을 이루기가 예전보다 더 수월해졌어요.” 가볍게 몸을 풀다가 선수들 무리로 들어간 박 촌장은 그들과 함께 몸을 풀며 땀을 흘렸다. “우리 폐에는 약 3억 개의 폐포가 있어요. 가만히 앉아서 늘 신문이나 보고 뜀박질도 안 하고 걸어만 다니면 1~2억 개 폐포만 활동을 해요. 폐 기능이 떨어지는 거지. 그런데 나 같은 사람은 수시로 뛰어 다니고 운동을 하니까 폐세포들이 다 활동을 한다고. 컴퓨터 앞에만 있다 보니 근력 없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데 어떻게든 근육을 키워야 해요.”


PM 12:00 식당을 보면 금메달 개수가 보인다
식당에는 반가운 얼굴이 있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귀염성 있는 얼굴의 이 선수는 시원한 한판승을 이어가며 결승전에 올랐고 마지막 무대에서도 통쾌한 승리를 거뒀다. 유도 간판 최민호. 취재진과 눈도 잘 마주치지 못할 만큼 수줍음이 많은 그는 이번 올림픽에는 출전하지 못한다. 한 체급을 올려 66kg에 나서려고 했던 그의 도전은 가시밭길 이었다. 올림픽 출전 포인트를 따기 위해 아시아선수권대회에 나가 은메달을 땄지만 국내 최강자 조준호와의 일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 5월 14일 어깨들어 매치기 한판으로 조준호마저 꺾었지만 선발전과 국제대회 점수, 국제유도연맹 순위를 기준으로 최종 출전자를 가리는 규정 때문에 조준호에게 출전권이 돌아갔다. 올림픽에는 체급별로 단 한 명의 선수만 나갈 수 있다.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잘 되도록 해야죠”라고 말하던 최 선수의 얼굴이 생생하다. 장미란 선수도 있었다. 인상, 용상 합계 326kg의 기록을 갖고 있는 그녀는 327~328kg을 들어 올린 러시아의 타타아나 카시리나, 중국의 주룰루와 함께 금메달을 다툰다. 그녀의 목표는 330kg. 박 촌장은 “여긴 없지만 이용대 선수도 다시 한번 금메달을 딸 확률이 높아. 인사성도 밝고 품성도 좋고 훈련도 열심히 하고 참 괜찮은 선수예요”라고 했다.

식단은 풍성했다. 제육볶음, 만두, 떡꼬치, 생선가스, 샐러드 등 10~12가지의 찬이 준비됐다. 한쪽에서는 스테이크를 구워줬다. 20년 넘게 태릉선수촌 식당에서 일하는 조리장 신승철 씨와 영양사 조성숙씨는 식당 분위기만 봐도 금메달 수가 대략 보인다고 했다. 이번엔 몇 개냐고 물었다. “에이. 그건 대답할 수 없죠. 분위기가 좋다는 것밖에 말할 수 없어요”라며 웃는다. 특히 마음이 가는 선수가 누구냐는 질문에는 왕기춘, 최민호, 김재범 등 유도 선수들을 꼽았다. 다른 선수들도 모두 깍듯하지만 유도 선수들이 특히 인사성이 밝다고. 김재범 선수는 신승철 씨를 장인어른이라 부르며 딸을 달라고 애교를 부린단다.

PM 14:00 이기려면 즐겨라!
태릉선수촌의 모든 선수들이 하루에 한 차례 이상 들르는 곳이 바로 운동 시설이 빼곡하게 들어찬 실내 체육관 ‘월계관’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여기저기서 끙, 후우, 아악 하는 고통에 찬 신음 소리가 들린다. 모든 선수가 영광의 월계관을 쓰면 좋겠지만 승자는 적고, 많은 선수들은 눈물을 삼키며 4년 후를 기약한다. “선수들에게 강조하는 말이 있어요. ‘바로 오늘이 올림픽이라고 생각하고 연습해라!’ 이런 마음가짐과 결의가 쌓이고 쌓여 폭발하는 에너지가 되는 겁니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까, 내일부터 열심히 하지 뭐, 이런 마음으로는 절대 근육이 안생겨요.

회사 일도, 글 쓰는 것도 다 마찬가지 아닙니까? 철두철미한 자기 관리와 열정이 없으면 내공도 안 쌓입니다.” 박 촌장은 그러면서 “즐기는 선수가 결국 금메달을 목에 걸더라”라고 말했다. “많이들 말하잖아요. 열심히 하는 사람이 즐기는 사람을 못 이긴다고. 그런데 이 말이 맞아요. 아무리 열심히 하는 사람도 즐겁게 훈련을 하고 어떻게 하면 경기력을 더 끌어올릴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람을 못 이겨요. 고통의 에너지보다 희열의 에너지가 더 센 겁니다.” 올림픽 출전권을 놓고 마지막까지 고투 중인 선수들에게는 “불안하고 자신을 안 믿으니까 지는 거다. 이렇게 열심히 한 적이 있느냐! 스스로를 믿어라”라며 기를 불어넣었다.

“스포츠는 결국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에요. 그래서 멘탈 트레이닝도 하는 겁니다. 요가를 포함해서 여러 방법이 있는데 가장 좋은 것은 일상에서 집중하는 훈련을 하는 거예요. 맛있게 밥 먹고 열심히 달리고 쉴 때는 다른 생각 안 하고 푹 쉬면 돼요. ‘지금부터 집중해야지’ 하고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는다고 해서 마인드 컨트롤이 되는 게 아닙니다. 평상시 훈련이 안 돼 있으면 중요한 순간에도 절대 집중이 안 돼요.”


PM 16:00 누구에게나 마지막 기회는 온다
월계관에서 선수들을 챙긴 박 촌장은 태권도, 유도, 레슬링, 체조 등 각 팀별 훈련장으로 이동했다. 선수촌에는 선수들이 많지 않았다. 선수들은 마지막 출전 티켓을 손에 쥐기 위해 아시아로 유럽으로 떠났다. 가는 선수들을 남은 이가 배웅했다. 사격, 양궁, 복싱 등의 종목은 여기저기서 최종 ‘리허설’을 했다. 학교 선생님, 친구, 부모님을 불러놓고 실제 시합과 똑같은 방식으로 하는 경기. 담대함과 경기 운영 능력을 키우기 위한 방법으로 양궁의 경우 야구장을 빌려 연습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동원되고, 미리 녹음한 사람들의 함성이 스피커로 울려 퍼진다. 평소 잘 쏘던 선수들도 마음이 흔들려 낮은 점수를 받곤 한다. “올림픽 금메달은 하늘이 주는 거예요. 평소에 주목을 안 했는데 현장에서 펄펄 나는 선수들이 있어요. ‘저 자식 뭐야?’ 하는 소리가 나오죠. 컨디션과 신체 사이클, 자신감이 딱 맞아떨어지면 막을 수가 없어요. 평상시 사자로 보이던 상대가 강아지로 보이는 거지요. 그래서 코치들도 사고를 칠 만한 선수들을 평소 눈여겨봅니다. 이번 올림픽에서도 일을 내는 선수들이 분명히 있을 겁니다. 그런 선수들까지 챙기는 게 제가 할 일입니다.” 태권도 훈련장에서는 우렁찬 기합 소리가 울려 퍼졌다. 총 8개의 금메달이 걸려 있는데 메달이 쏠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한 국가당 네 체급에만 출전할 수 있다.

2004 아테네 올림픽, 2008 베이징 올림픽에 이어 3회 연속 태권도 국가대표 팀을 이끄는 김세혁 감독이 말했다. “종목별 경쟁이 아주 치열합니다. 54개국이 출전하는데 아프리카 선수들을 포함해 잘하는 선수들이 워낙 많아요. 그렇다 보니 각국이 체급별 강자를 피해 출전 체급을 정합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닌데 태권도 종주국으로서 왕 중의 왕인 남자 헤비급에는 꼭 출전을 하지요.” 그의 사무실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 있었다. ‘지도자는 뿌린 대로 거둔다’, ‘마지막 기회는 반드시 온다.’

PM 18:00 그들 모두에게 격려와 박수를….
올림픽이 가까워오면서 팀별 야간 훈련과 보강 훈련이 많아졌다. 9시까지 훈련하는 팀도 있었다. 박 촌장은 이들을 쫓아다니며 “이제 그만해라. 자야 힘을 쓸 수 있다”고 말했다. “뇌파가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때가 저녁 10시에서 12시예요. 이때 숙면을 해야 다음날 또 상쾌한 기분으로 훈련에 집중할 수가 있어요. 훈련을 열심히 하는 것만큼 푹 자는 것도 중요합니다. 죽어라 훈련하는 선수와 코치들을 따라다니며 오늘은 그만 됐다, 쉬고 내일 또 하자고 설득하는 것도 제가 하는 중요한 일 중 하나예요. 중요한 것은 질이지 양이 아니에요. 집중해서 팍 하고 에너지를 끌어올리려면 충분히 쉬면서 몸을 만들어야 합니다.”

열심히 훈련하는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봤으니 올림픽에서 경기를 지켜볼 때마다 감회가 얼마나 남다를까. “기쁨도 두 배, 슬픔도 두 배겠지요.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떨어져봐요. 엄청 안 울겠습니까?” 그러면서 덧붙였다. “은메달, 동메달은 물론이고 메달을 못 따는 선수들에게도 많은 격려와 박수 보내주시면 좋겠습니다. 운동선수가 아는 것이 없다고 무시하는 분들이 종종 있는데 의사는 의술 공부하고, 공학자는 기계 공부하고, 제빵사는 빵 공부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열심히 운동 공부한다고 생각해주시고 응원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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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꽉! 힘 팍!

서울 노원구와 경기 남양주시 별내면의 경계에 있는 불암산(佛巖山)은 산 정상부의 바위가 부처의 형상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금강산 자락에 머물다 ‘한양의 남산’이 되고 싶어 한양에 왔지만 간발의 차로 늦어 남산을 등지고 주저앉았다는 한(恨)의 전설을 가졌다. 600년 세월이 흘러 불암산은 한국 엘리트 스포츠의 출발이자 전진기지가 됐다. 1966년 불암산 자락에 국가대표의 요람인 태릉선수촌이 태동한 것. 선수들에게 이곳은 제2의 집이다. 아니, 집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다.

불암산 달리기는 태릉선수촌 설립 이듬해인 1967년부터 시작됐다. 한국 스포츠의 역사를 썼던 대한의 아들딸들은 불암산에 몸과 정신을 맡겼다. 꼼수는 용납이 안 됐다. 고통의 땀과 눈물이 뒤엉킨 불암산은 지금도 물기가 마를 날이 없다. 불암산은 부처의 마음으로 선수들을 품었다. 그래서 불암산 달리기는 선수들에게 공포의 대상이면서 용기와 자신감의 원천이다.

이른 새벽 불암산 달리기부터 달빛을 벗 삼아 이어지는 야간훈련까지…. 아시아경기대회 개막을 한 달 남짓 앞둔 태릉선수촌을 닷새에 걸쳐 들여다봤다.  

▼ 심장이 터질듯한 산악훈련… 끝인가 싶은 순간 “다시” ▼

죽음 같은 하루의 시작… 불암산 지옥훈련


오전 6시. 태릉선수촌의 하루 일과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간이다. 선수들이 8일 새벽 훈련을 하기 위해 숙소 밖으로 나서고 있다(왼쪽 사진). 11일 유도 여자 태극전사들이 15kg이 넘는 모래주머니를 어깨에 멘 채 불암산을 달리고 있다. 유도 여자대표팀은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2차례씩 공포의 ‘불암산 훈련’을 한다. 

먼동이 터 오는 11일 오전 5시 50분.

“뛰어, 뛰어!”

서정복 유도 여자대표팀 감독의 호령이 불암산을 깨운다. 태릉선수촌 챔피언하우스 뒤쪽 불암산 산악코스 출발점에 모인 유도 여자 선수들의 지옥훈련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소리다. 주말이 지나고 다시 한 주가 시작되는 월요일. 선수들에게도 ‘월요병’은 존재하는가 보다. 주말을 틈타 시나브로 긴장이 빠진 몸이 좀처럼 말을 듣지 않는다.

웬만한 종목의 선수들은 보통 왕복 8km의 구불구불 좁은 산길을 탈진할 때까지 뛰지만 여자 유도는 다르다. 일단 3km가량을 뛴 뒤 강도 높은 산악 훈련이 이어진다.

“하루 종일 걷기만 할래. 뛰란 말이야.”

처진 선수들이 보이자 황희태 코치(수원시청)가 호통을 친다. 그는 2006년 도하 대회(남자 90kg급)와 2010년 광저우 대회(100kg급) 등 아시아경기에서 금메달만 2개를 딴 유도 중량급의 간판스타 출신이다. 선수 시절보다 체중은 더 불었지만 선수들과 함께 뛰며 보조를 맞췄다.

이른 아침이지만 수은주는 섭씨 28도까지 올라갔다. 선수들의 트레이닝복은 이미 땀으로 흠뻑 젖었다. 방금 빨래를 마친 옷처럼 물기가 뚝뚝 흘러내린다.

“유 기자! 긴 팔 안 입고 왔어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유도 여자부 금메달리스트인 김미정 코치(용인대 교수)가 선수들과 함께 달리던 기자에게 한마디 툭 던진다. 정신을 차려 보니 이미 한쪽 팔뚝과 손목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가렵다. 모기에게 물린 것이다. 여름 막바지 허기가 잔뜩 오른 모기떼는 ‘독사 같은’ 코치들보다 더 무서운 존재다. 얇은 옷 정도는 쉽게 뚫고 들어와 ‘한 방’ 먹인다. 걷고 있으면 여지없이 모기에게 물리기 때문에 빨리 뛰어야 산다.

숨이 턱에 차오를 때까지 10분 정도 뛰어 산 중턱에 오르니 더 가혹한 상황이 기다리고 있다. 언덕 아래 150m가량 지점에서 전속력으로 언덕 정상으로 올라오는 인터벌 훈련이다. 마지막 40m는 절벽 같은 급격한 경사를 이겨내야 한다.

2013 세계여자유도선수권대회 78kg급 동메달리스트 이정은(26·안산시청)의 고통스러운 울음소리가 들린다. 몸과 마음이 절로 숙연해졌다. ‘눈물 고개’나 다름없다. 그나마 몸이 가벼운 선수들도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이 지점에선 ‘한판승의 사나이’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남자 73kg급 금메달리스트인 이원희 코치(용인대 교수)가 ‘저승사자’다. 이 코치는 선수들이 간신히 한숨 돌리려는 시간까지 매정하게 빼앗는다. 여자부 최경량 체급인 48kg급 정보경(23·안산시청)은 물을 마시려다 물통 잡는 걸 포기했다.

심장이 터질 듯한 고통 속에서 선수들은 U자 모양의 모래주머니를 들었다. 들어 보니 15kg은 충분히 넘을 것 같다. 중량급 선수들의 모래주머니는 더 무겁다.

이 무거운 모래주머니를 어깨 위로 들어 올렸다 아래로 내리고 다시 머리 위로 올려 360도 회전시켜 돌린다. 30회 반복이다. 정확한 동작이 나오지 않으면 코치들이 숫자를 세지 않았다. 요령은 고통만 더할 뿐이다. 한 번으로 끝이 아니다. 언덕 뛰기와 모래주머니 훈련을 다섯 차례 반복한다. 선수들은 초죽음에 이른다. 극한을 자연스럽게 경험한다.

“힘들수록 집중, 집중!”

이 코치의 호통이 선수들을 다시 깨운다. 서 감독은 “유도는 체력이 바닥난 상황에서도 정신을 집중해 마지막 힘을 최대한 쓸 수 있느냐가 관건”이라면서 “마지막 파워를 높이는 데 효과가 크다”고 설명했다.

‘드디어 끝인가’ 싶었는데 아니다. 선수들의 다리는 완전히 풀렸다. 그 상태로 언덕에서 70m를 더 내려간 뒤 2인 1조가 돼 다시 언덕을 올랐다.

이번엔 비슷한 체급의 선수가 한 선수를 어깨에 멘 채 뛴다. 천근만근이 된 몸에 본인의 체중을 하나 얹는 ‘핸디캡’이 추가된 것이다. 언덕 오르내리기를 4차례 반복했다. 두 번은 메고, 두 번은 안고 뛴다. 체력을 완전히 소진한 상황에서 승부를 결정짓는 기술을 걸기 위한 ‘설정’이다.

메고 있던 동료를 놓으려 할 때마다 코치들은 “다시”를 외쳤다.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다. 흐느껴도 소용없다. 황 코치는 “한계를 버텨냈을 때 비로소 스스로 한 단계 성장했다는 걸 느끼기 때문”이라며 선수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또 세웠다.

“흑흑∼ 엉엉∼.”

탈진한 이정은은 눈물을 쏟으면서도 버텨냈다. 이정은에게 안긴 동료는 오르막에서 이정은이 혹시라도 뒤로 넘어질까 봐 자신의 무게 중심을 이정은의 앞쪽으로 살짝 옮겼다. 몸으로 배운 배려다.

“이렇게 대충 하면 토요일 외박은 없다. 나는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다. 제대로 하면 금요일부터 외박을 줄 수도 있다.”

서 감독은 채찍과 당근으로 선수들을 들었다 놨다 했다. 선수들은 “파이팅”을 외치며 희미해진 집중력을 살려냈다. 언덕에서 말없이 훈련을 지켜보던 최종삼 태릉선수촌장도 “끝까지 해”라며 주먹을 꽉 쥔다. 최 촌장은 유도 대표팀 감독과 대한유도협회 부회장을 지냈다. 불암산 훈련의 고통과 보람을 누구보다 잘 안다.

남은 마지막 훈련으로 고통은 정점을 찍는다. 2인 1조가 돼 서 있는 선수가 엎드린 선수의 두 다리를 잡은 채 엎드린 선수가 양손으로 언덕을 오른다. 이것으로 1시간 20분간의 불암산 산악 훈련은 끝났다.

“말 그대로 죽음이죠.” 52kg급 정은정(25·충북도청)이 말한 ‘불암산 훈련’의 의미는 간단명료했다. 훈련을 어렵게 견뎌낸 이정은은 한 개그 프로그램의 유행어를 끌어와 “끝!”이라고 정리했다. 그래도 공포를 이겨낸 보람에 취해 말한 긍정의 정의다. 유도 여자대표팀은 9월 초까지 한 주에 월, 목요일 두 차례 불암산 훈련을 소화할 예정이다.

“불암산 훈련 하는 날이면 혹시나 취소되기를 바라며 비가 오게 해 달라고 빌어요. 그런데 폭우가 와도 취소되는 경우는 없더라고요.”

이제야 제 얼굴빛을 찾은 선수들이 아침 식사를 하러 식당으로 가면서 애교 섞인 불평을 늘어놓는다. 기자가 위험(?)을 무릅쓰고 한마디 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요, 불암산!”


선수촌 최고 메뉴는… 짜장면!

2014 인천 아시아경기대회 개막을 한 달 남짓 앞둔 태릉선수촌에는 땀 냄새가 가득했다. 레슬링, 펜싱, 유도 여자 대표 선수들(왼쪽부터)이 실전을 방불케 하는 훈련을 하고 있다.

선수들이 불암산 훈련에 나설 채비를 하는 오전 5시 30분. 태릉선수촌 올림픽의 집 1층 한쪽에도 불이 켜진다. 숙소를 제외하고 선수촌에서 가장 일찍 아침이 시작되는 선수식당 주방이다. 현재 선수촌에 머무는 태극전사 약 400명(겨울종목 포함)의 영양을 책임지는 곳이다. 290m²(약 88평) 크기의 주방에는 흰 모자와 가운 차림의 조리사와 조리원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다.

선수촌 식사는 매 끼니 뷔페식으로 준비된다. 7일의 경우 아침 메뉴는 녹두죽, 베이컨, 소시지, 시리얼, 멜론, 바나나, 그린샐러드, 방울토마토, 버섯오믈렛, 계란프라이, 쌀밥, 사골우거짓국, 마늘장아찌, 그리고 2종류의 빵이 준비됐다. 벽에 붙여 놓은 식단표에 적힌 양만큼 접시에 담으면 열량은 총 1566Cal. 2000Cal에 이르는 점심 저녁 식단에 비하면 가볍게(?) 시작하는 아침이다.   

▼ 고이 모셔놓은 하이힐… “조금만 참아, 맘껏 신어줄게” ▼

2011년 한국으로 귀화한 중국 출신 여자 탁구선수 전지희가 태릉선수촌 훈련장에서 서브를 넣고 있다. 인천 아시아경기는 그동안 국제탁구연맹 귀화선수 규정에 묶여 세계선수권대회에 나가지 못했던 전지희가 처음 출전하는 메이저 대회다. 

오전 7시가 되자 식당은 불을 환히 켜고 본격적으로 선수들 맞을 준비를 했다. 일찍 도착한 코칭스태프와 선수들 사이로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뜀틀의 신’ 양학선(22·한국체대)이다. 선수촌 식사가 어떤지 묻자 “워낙 좋아 안 먹으면 손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는 “하루 중 점심이 제일 잘 나오는데 체중 조절에 신경 쓰는 체조 선수들은 점심을 먹지 않을 때가 많다”며 “어느 코치 선생님은 선수 시절 점심을 못 먹은 게 아쉬워 지금은 무조건 세 끼를 챙겨 먹는다고 농담을 할 정도”라며 웃었다.

주방에서 하루 동안 일하는 인원은 총 18명. 식당을 총괄하는 검식사와 식단을 책임지는 영양사, 조리사 6명(제빵사 1명 포함), 조리원 10명이다. 조리사는 한식·양식·중식 자격증을 갖고 있는 이들과 직접 빵을 굽는 제빵사도 있다.

선수촌에서는 건강식만 나올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피자, 치킨, 떡볶이 등 좋아하는 메뉴를 다양하게 준비하기 때문에 바깥 음식을 그리워할 일이 별로 없다고 선수들은 말했다. 어지간한 중국음식점보다 맛있다는 짜장면은 선수들이 가장 좋아하는 메뉴다. 필드하키 여자대표팀의 한혜령(28·KT)은 “동기들끼리 자주 ‘아, 짜장면 나오면 좋겠다’고 말할 정도로 맛있다”며 엄지를 세웠다. 8월부터는 매주 화요일 점심에 초밥, 랍스터 등 특식이 제공된다. 인천 아시아경기와 각종 국제대회를 앞둔 선수들의 힘을 북돋워주기 위해서다.

1984년부터 선수들의 식사를 책임져 온 신승철 검식사(53)는 선수식당의 살아 있는 역사다. 그는 “과거에 비해 가장 달라진 점은 식단”이라고 말했다. 식재료 구매 예산이 오른 뒤 식단이 풍성하고 좋아졌다는 것. 현재 선수식단의 1인당 하루 3끼 재료비는 약 3만6000원이다. 눈빛만 봐도 그날의 컨디션을 알 수 있을 만큼 선수들과 친근하게 지내는 그는 가장 맛있게 음식을 먹는 선수로 이원희 유도 여자대표팀 코치와 은퇴한 ‘역도 여제’ 장미란을 꼽았다.

냄새 때문에 메뉴에 잘 올리지 않던 청국장이 식단에 오르게 된 것도 장미란 덕분이다. 몇 년 전 장미란이 농담처럼 신 검식사에게 “왜 청국장은 안 줘요? 해 주세요”라고 말한 뒤부터 지금도 선수식당에는 가끔 청국장 냄새가 풍긴다.

예쁜 구두도… 재미있는 드라마도 안녕

점심 식사가 끝나면 선수촌은 잠시 숨 고르기에 들어간다. 오후 3시 훈련이 시작되기 전까지 꿀맛 같은 휴식이다.

대표팀의 하루는 대부분 오전 6시경 새벽 훈련으로 시작해 오전 10시∼낮 12시와 오후 3∼6시 훈련으로 이뤄진다. 식사 때 숟가락 들 힘도 없을 만큼 고된 훈련이 계속되는 셈이다. “조금이라도 더 쉬고 싶어 일부러 식사를 15분 내에 끝낸다”는 리듬체조 대표팀 이경은(22·한체대 대학원)의 말처럼 그들에게는 잠깐의 휴식도 절실하다.

선수들 대부분은 휴식시간 동안 숙소에서 재충전을 한다고 했다. 그들은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낼까. 궁금한 마음에 여자선수 숙소인 감래관(甘來館) 3층 레슬링 선수들의 방을 찾았다. 선수들 숙소는 2인 1실이 기본. 가구라고 해 봐야 침대, 옷장, 책상 2개씩과 작은 냉장고가 전부다. 여기에 하나 더. 땀을 달고 살기에 빨래 건조대가 필수다. 방마다 2, 3개씩 펼쳐져 있는 건조대에는 스포츠 타월과 운동복이 잔뜩 걸려 있다. TV가 있는 방도 있지만 대회가 코앞에 닥친 요즘은 거의 전등처럼 켜 두기만 할 뿐 제대로 보는 일이 없다.

곳곳에 숨어 있는 물건들이 여자들이 묵는 곳이란 걸 말해줬다. 엄지은(27·제주도청)과 오현영(25·유성구청)이 함께 쓰는 방의 신발장에는 굽이 높은 구두가 다섯 켤레 들어 있었다. 책상 서랍을 열면 헤어스타일링 기기와 색조화장품도 보였다. 전부 주말 외출 때 ‘변신’하기 위한 도구들이다. 책상 아래에는 간식거리와 화장품 등을 담았던 택배 상자가 쌓여 있다. 밖으로 나갈 시간이 별로 없는 이들이 자주 애용하는 홈쇼핑의 흔적들이다. 선수촌 내에는 미용실이 없다. 주말이 되면 여자 선수들은 가까운 노원역이나 먹골역으로 나가 쇼핑을 하고 머리 손질도 한다. 하지만 대회가 가까워지면서 최근에는 주말의 소소한 즐거움도 사치가 됐다. 선수들은 “쉬는 때는 그저 자는 게 최고”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밀린 잠을 자지 않을 때는 경기 동영상을 보며 전력 분석을 하기도 한다. ‘탁구 얼짱’ 서효원(27·한국마사회)은 평소 좋아하던 드라마 시청도 꾹 참고 있다. 요즘은 쉴 때도 유튜브를 통해 다른 나라 선수들의 경기 동영상을 보는 게 마음 편하다. 선수촌 밖에서 친구를 만나는 것도 자제하고 있다. 혹시 컨디션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가끔 시간이 날 때 근처 커피전문점에서 마시는 녹차 프라페(얼음을 갈아 만든 음료)가 요즘 그의 유일한 즐거움이다. 그는 “인터넷으로 무슨 드라마가 방영되는지 체크만 하고 있다. 대회 끝나면 몰아서 보려고 벼르고 있는 게 한두 개가 아니다”라며 웃었다.

숙소만큼 선수들이 자주 찾는 곳이 또 있다. 바로 스포츠의무실이다. 부상이 잦다 보니 하루 평균 60∼80명의 선수가 찾아온다. 이들을 위해 의사 간호사 2명씩과 물리치료사 9명이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상주한다. 의무실을 가장 많이 찾는 건 레슬링, 유도처럼 경기 중 물리적 접촉이 많은 종목 선수들. 허리는 대부분의 선수들이 통증을 느끼는 부위다. 쉬는 시간에는 선수들이 많이 몰려 치료를 받기 어렵기 때문에 아예 코치진의 허락을 구하고 훈련시간에 찾아오는 이들도 있다. 여자 필드하키 대표팀 장수지(27·아산시청)는 “부상이 잦아 하루 한 번은 꼭 오는데 시간별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인원이 정해져 있다 보니 빨리 등록하는 게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고단함을 견뎌내게 하는 건 ‘금빛 꿈’

▲ 8일 새벽 훈련을 마친 선수들이 선수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있다. 식사는 매 끼 뷔페식으로 준비된다. 

고된 하루가 저물어도 선수들의 땀은 식지 않는다. 종목에 따라 일주일에 서너 번 이상 야간 훈련이 있기 때문이다.

8일 저녁 유도 여자대표팀이 야간 훈련을 하던 승리관 유도연습장에는 케이크가 등장했다. 이날은 인천 아시아경기 78kg 이상급에 출전하는 김은경(26·동해시청)이 태어난 날. 생일도 챙기지 못하고 훈련을 했던 김은경은 이날 오후 훈련 과정에서 왼쪽 어깨에 통증을 느껴 훈련을 잠시 중단하기도 했다. 잠시나마 시간을 내준 코칭스태프와 팀 동료들 덕분에 김은경의 얼굴에 웃음이 돌았다.

선수촌이 잠드는 시간은 오후 10시. 야간 훈련은 대개 오후 9시 30분까지 이어진다. 인천 아시아경기가 30여 일 앞으로 다가온 요즘, 촌음이 아쉬운 선수들은 스스로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개인 훈련도 멈추지 않는다. 에어컨을 틀어놓은 실내에서도 선수들의 훈련복은 금세 색깔이 변한다. 이들이 하루 종일 흘린 땀은 늦은 밤 숙소에서 샤워를 해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한 방울 한 방울이 몸에 배어 실력으로 쌓인다. 선수들은 매일 한 겹 더 단단해진 실력을 이불 삼아 기절하듯 잠에 빠진다.

한국 스포츠의 역사를 온몸으로 품고 있는 태릉선수촌. 누군가는 이곳을 창살 없는 감옥에 빗대고, 누군가는 이곳이 집보다 더 편하다며 웃는다. 선수들이 이곳에 스스로를 맡긴 이유는 하나다. 오늘의 땀을 내일의 메달로 바꾸겠다는 의지. 땀이야말로 태릉선수촌 최고의 경쟁력이다.